역사로 多이로운 문화도시 익산
“의(義)는 힘을 이긴다”
익산의 의병장 오하 이규홍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국권을 잃자 익산의 유생 이규홍(李圭弘, 1881-1929)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4월 이규홍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평생 동지 박이환, 문형모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호남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을 찾아 스승의 예를 갖췄다. 아들의 의지를 접한 아버지 기영공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보국의 도리를 다하게 된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 가산의 전부라도 바칠 테니 오로지 국가에 헌신하라”며 이들을 후원했다.
1907년 1월 전라도의 의병장 최익현이 쓰시마섬에서 순국하자 이규홍은 가산을 팔아 의병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전주에서 해산된 진위대원 100명과 익산·여산 일대의 산포수와 뜻있는 인사들이 참여했다. 익산의병의 출병식에서 이규홍은 “왜군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의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다.
이규홍(李圭弘, 1881~1929)
이규홍 의병군은 진안·장수·용담 일대에서 활동하며 1907년 11월 15일 가금리 전투에서 일군 29명을 사살했고, 12월 25일에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4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이규홍의 목에 4,000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 결국 1908년 4월 20일 부대를 해산했다.
이규홍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김규식과 김좌진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 후 국내로 들어와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이규홍은 1924년 2월 8일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4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1929년 6월 6일 향년 48세로 눈을 감았다.
박이환(朴駬桓, 1873~1953)
이리·익산
3·1 운동의 경로와 지도자들
이리·익산의 3·1운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만세운동은 3월 10일과 4월 4일 벌어졌다. 3·10 만세운동은 천도교 익산교구의 조직적인 독립선언문 배포로 시작되었고, 같은 날 박사국 등이 여산에서 주도한 만세운동 등이 있다. 4.4 만세운동은 오산 남전교회가 주도했다. 익산의 천도교와 기독교는 3.1 운동 초기부터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협력했다.
3·1 운동에 가장 앞장선 조직은 동학의 뒤를 이은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단체들과 청년들이 모여 있는 학교였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전북의 3·1운동은 군산이 가장 빨랐는데 군산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 의전학생인 김병수가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지고 내려왔고, 3월 5일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3·5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13일 전주 풍남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리·익산의 천도교의 3·1운동은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천도교 이리·익산교구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교주인 손병희와 익산 출신 오지영 등과 연락하며 3·1 만세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3월 1일 익산 천도교구장 박영진(朴永鎭) 등은 전주천도교로부터 독립선언서 500여매와 만세운동의 방법을 전달받았다.
4월 4일 이리·익산의 만세운동은 다시 한번 뜨겁게 타올랐다. 이번에는 남전교회가 중심이 된 기독교의 만세운동이었다. 남전교회 문용기는 같은 교인 김치옥, 박성엽과 의기투합했다. 김치옥은 군산 구암교회에서 군산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임종우, 군산 선교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성엽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박성엽은 군산 만세시위 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문용기는 남전교회 장만준, 전창연 도남학교 교사 김연인 등을 만나 솜리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리와 익산군 일대의 교회(고현, 동련, 함라, 널문이, 여산, 웅포, 신등, 화전교회)와 익산지역 천도교 측에도 연락하며 4월 4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연대미상)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약간 축약하여 고쳐 만든 것이다. 끝부분에 33인이 아니라, 한규설·곽종석·전우·최린·윤용구·손병희·오세창 등이 적혀있다.
이리·익산의
3·10 만세운동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전달받은 박영진은 이리·익산의 교구장들인 홍영섭, 김병호, 이중열, 이유상, 정대원, 유봉우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측과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각 면의 연락 지도 및 동원 책임자를 정하는 등 치밀하게 거사계획을 진행시켰다. 박영진은 황화면과 여산읍을, 홍영섭은 성당면과 낭산면, 이중열은 익산·강경·논산·함열 등 각 철도역을, 김병호는 여산읍, 송일성은 함열면(咸悅面)과 논산(論山), 유봉우는 웅포면, 이유상은 대야면을 맡아 3월 1일과 2일 사이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당시 익산군에는 천도교인이 많았고 그에 따라 천도교의 기념일인 교주 최제우가 순도(殉道)한 3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고, 순도기념식이 끝난 후 오후 9시를 기하여 군내 각면·각리에서 일제히 산 위에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에 들어가기로 했다. 드디어 3월 10일 오후 9시 이리·익산의 곳곳에서 횃불이 오르고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체포되지 않았던 유봉우는 웅포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3월 10일 이와 동시에 여산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박사국, 이정, 이병석, 정영모 등은 여산면 정영모의 집으로 주민들을 불러놓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한 뒤,‘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고 거리로 나섰다. 박사국 등은 2백여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만세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모두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금마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3월 18일~19일에 만세시위가 열렸는데, 왕궁면에서는 18일날 김광덕, 송종석 등이 앞장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28일에는 춘포면에서 소진석 등이 주동하여 수백 명이 만세시위에 나섰다.
3·1운동 기념비 제막식(1971년 8월 15일)
1971년 8월 15일 익산 3·1운동 기념비 건립협찬회와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익산역 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4·4 만세운동과
문용기 열사의
죽음
이리 최대의 만세운동은 4월 4일 이리시장(지금의 남부시장)에서 시작되었다. 문용기가 만세운동의 준비에 고민하고 있을 때 남전교회 신자 김치옥과 박성엽이 찾아왔다. 김치옥은 군산 구암교회에서 군산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임종우로부터 권유를 받고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침 군산 선교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성엽을 만나 만세운동을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박성엽은 군산 만세시위 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문용기 등은 이제 남전교회 장만준, 전창연 도남학교 교사 김연인 등을 만나 솜리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리와 익산군 일대의 교회(고현, 동련, 함라, 널문이, 여산, 웅포, 신등, 화전교회)와 익산지역 천도교 측에도 연락했다. 남전교회 박다연, 정군덕, 김만수의 집에서 사흘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 4월 3일 밤, ‘내일 오전에 교회로 모일 것’, ‘복장은 흰색 한복차림으로 차려입을 것’ 등을 남전교회가 있는 남참마을, 북참마을, 영성마을 책임자에게 연락했다. 만세시위에 참여할 교인과 학생들은 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4월 4일, 그날은 장날이었고 3백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문용기 열사와 동지들은 정오에 맞춰 비밀리에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시위대는 장터 네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맨 앞에서 시위군중을 이끌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던 이가 문용기 열사였다. 대교농장 앞에서 당시 남전교회 성도였던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서정만, 박현도 등 성도들과 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명이 함께 시작했으며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합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때 시위대의 맨 앞에서 시위를 이끌던 문용기 열사에게 일본 헌병들이 달려들었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먼저 문용기 열사의 오른팔을 치자, 이에 열사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했다. 일본 헌병이 왼팔마저 베어 버리자,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불렀다. 격분한 헌병은 쫓아가 그의 몸을 난자하였고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문용기 열사는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新)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의 독립된 국민이 되게 하겠소.”
4·4 만세운동 기념 재현 행사(2014년)
소통신문 제공
4·4 만세운동의 현장인 남부시장에 지어진 기념공원
문용기 열사의
일생과
의로운 죽음들
문용기(文鏞祺, 1878-1919)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익산군 오산면 관음마을에서 태어났다. 문용기는 한학을 배워 인근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고,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24살이란 늦은 나이에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문용기는 신학문을 배우는 학생이면서 한문 선생을 겸했다. 30세가 된 1908년에는 목포의 짠 왓킨스중학교(영흥학교로개명)에 입학, 재학 중 이승만과 만나게 된다. 이 인연으로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통령이 된 후 익산을 찾아 문용기 열사의 애국적인 죽음을 기리고 그의 추모비에 직접 글과 글씨를 남겼다.
문용기(文鏞祺, 1878~1919)
1911년 학교를 졸업한 문용기는 두만강에 인접해 있는 함경도 갑산으로 향했다. 학교 추천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금광에 통역사로 취직한 것이다. 문용기는 일찍이 남전교회에 서 전킨, 부위렴, 해리슨 목사 등을 만나면서 영어를 익혔다. 문용기는 이곳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치다, 3·1운동이 벌어지자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아침 ‘나물 많이 캐 오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문용기 열사의 아내 최정자는 4·4 만세운동 후 남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해 고향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열사가 입고 있던 하얀 한복을 혈흔이 낭자한 그 옷을 고이 접어 보관하다 해방이 되던 해 그 옷을 꺼내 놓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1992년 문용기 열사의 옷은 자부 정귀례 여사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제1호로 기증되어 보관 전시 중이다.
익산 4·4 만세운동의 과정에서 문용기 열사와 함께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신덕리 장경춘, 춘포면 박도현, 이리 서정만, 황화면 이충규 등이 함께 순국했다. 지금 오하시농장 앞에는 문용기 열사의 동상과 4·4 만세운동 기념공원이 꾸며져 있다.
4·4 만세운동의 현장인 남부시장에 지어진 기념공원
순국열사비는 1949년 문용기 열사와 순국열사들을 기리기 위해 이리시에서 세웠고 기념비의 휘호와 비문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현재 주현동 105-19번지에 있는 순국열사비는 1919년에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출신지인 익산군 오산면 소재지에는 순국열사기념비,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기념비가 각각 세워졌다. 1977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됐다.
4·4 만세운동을 주도한 남전교회는 오산면 남전리에 소재한 교회로 1897년 10월에 세워진 익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919년 전주지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던 부위렴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보고서에서 남전교회의 교인들의 4·4 만세운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 4·4 만세운동 다음날인 4월 5일에는 함열면 산상에서 강경까지 횃불시위를 벌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으며, 4월 8일에는 용안면 화배리에서 청년 박영문, 김기동, 차팔룡, 최팔문 등과 당시 14세의 소년 길귀동 등이 주동이 되어 산상에 올라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용기 열사가 순국하는 순간까지 입었던 옷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오산면에 있는 순국열사 충혼비
충혼비에는 4.4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의 이름이 세겨져 있다.
이리·익산의
신간회 운동과 운동가들
신간회는 1927년 2월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합으로 구성된 국내 최대의 항일 사회운동단체였다.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을 표방하며 전국적으로 120-150여개의 지회와 최대 4만여명의 회원을 두었다. 신간회는 1931년 해산될 때까지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집회결사와 언론출판의 자유, 청소년운동, 동양척식회사 반대투쟁 등을 전개했다.
일제는 신간회의 설립을 방해하며 탄압했다. 이리의 신간회 익산지회는 1927년 6월 22일 설립되는 과정에서 준비위원들이 선전문을 작성하여 배부하였는데, 이리경찰서는 그 문구가 불온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문건을 압수하며 설립대회를 방해하고 준비위원 3인을 체포했다. 이때 일경에 잡혀간 이들이 배헌, 임혁근, 임영택이다. 이들은 다음해 2월 출옥하여 귀향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조선일보는 1928년 2월 27일자에 ‘희생한 신간회원 수천 환영리 출옥, 행렬지어 시가 일주’라고 썼고, 동아일보는 29일자에 ‘3씨 출옥귀향, 리리역두에는 인산인해 5백여동지 출영’이라고 썼다.
익산 신간회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미비하다. 익산 신간회는 당시 이리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갑자연구회 및 이리청년회와 긴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사건으로 잡혀간 배헌 등 3인은 이리 사회주의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이리·익산지역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신간회 익산지회 사건을 담은 신문기사(동아일보 1927년 8월 11일 기사)
동아일보
신간익산지회사건
13일 군산에서 공판
신간회 익산지회 설립준비위원 중 배헌, 임혁근, 임영택 세명은 동대회 설립에 대한 선전삐라로 말성이 되야 그 동안 군산검사국으로 넘어가서 북촌 검사의 엄중한 취조를 바다 출판법과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되엿다함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지난 8일에 공판날이엿스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야 연기되얏던바 오는 13일에 군산법원 제1호 법정에 공판을 연다더라. [군산]
신간회 익산지회의
배헌·임영택·임혁근
배헌(裵憲, 1896-1955)은 일제강점기 익산의 신간회 운동뿐만 아니라 전북을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이다. 1896년 이리에서 태어난 그는 1913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성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이리·익산지국장을 지내며 항일투쟁을 했다. 그는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사회당 발기인대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전북기자협회에서는 2009년 언론인으로서 그의 공적을 기려 배헌기자상 제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1991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배헌(裵憲, 1896~1955)
임영택(林榮澤, 1901-1957)은 1901년 익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1월 익산에서 갑자연구회(甲子硏究會)라는 사회주의 비밀결사 결성에 참가했고, 그후 노동운동을 전개 하다가 검거되어 1925년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후 이리에서 창립된 자유노동자동맹, 익산노동연맹, 전북노동연맹, 이리청년회 등에 참여했다. 사회주의 사상단체 하트당 위원으로 익산청년연맹 창립을 이끌었고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 이리 프랙션 책임을 맡았으며, 1926년 신간회 창립준비위원으로서 ‘신간회운동은 독립운동의 수확이다’라는 격문을 작성, 배포했다가 배헌 등과 함께 실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1928년 7월 임혁근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임혁근(林赫根, 1898-1934)은 1923년 이리청년회에서 활동했고 1924년 사상단체 갑자연구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소식지 <민중운동>을 발간했다. 그해 이리노농청년회에서 활동했고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했다. 1926년 사상단체 하트당에 참가했으며 12월 조선공산당 2차 대회에 전북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 4월 중외일보 이리지국장으로서 전북기자단 정기대회 개최와 관련해 검거되었다가 5월에 풀려났다. 7월 다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4년 6월 30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임영택(林榮澤, 1901~1957)(좌)과 임혁근(林赫根, 1898~1934)(우)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일제강점기 일제가 감시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의 신상 정보 등을 기록한 카드이다.
4,858명에 대한 신상카드 6,264매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은 1928년 제4차공산당사건으로 피체된 후 만들어진 인물카드이다.
이리농림의
맹휴투쟁과
이상운 열사의
화랑회 사건
이리농림은 ‘내선공학’을 표방하며 1922년 일본인들이 세운 학교였지만,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든 이곳의 조선청년들은 피끓는 항일투쟁을 계속해왔다. 1930년 2월 박승구(농과 5년)는 독서회를 조직·활동하다 퇴학당하였고, 11월 추계대운동회 때에 일본인 교우가 한국인을 차별하자, 민족차별철폐운동을 전개하고 동맹휴학 사건으로 임과 4학년 윤수동 등 7명이 퇴학당하였다.
그리고 1942년 이리농림의 항일투쟁사에 가장 뜨거운 인물이었던 이상운과 그가 중심이된 ‘화랑회(花郞會)’가 조직되었다. 화랑회는 일제가 한국농민에 가한 혹독한 철권통치에 맞서고자 이리농림의 이상운과 장지환, 김직수, 서공휴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200여 명의 학생조직이다. 이들은 조선의 역사를 학습하며 자주독립의식을 높혀 나갔다. 대표 이상운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한알의 감자가 썩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희생정신을 강조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항일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져나갔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말기에 이르러 미영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한국의 서남해안에 대한 경계를 크게 강화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학생들에게 강제로 군사교육을 시키고 징병뿐만 아니라 정신대와 근로보국대 등의 이름으로 전쟁터로 보내고 있었다. 이에 1943년 이상운과 동기생 장지환(張志煥)·김구(金九)·김영준(金英俊)·호중기(扈仲基) 등으로 구성된 화랑회와 선배인 장이규(張二圭) 등이 조직한 항일결사대 독립당은 연합하여 무장 게릴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화랑회의 운동가들은 먼저 김제군 금구면 오봉리의 고갈봉 광산을 습격하여 다이너마이트, 트럭, 소총, 칼 등의 무기를 탈취한 후 곧바로 김제경찰서를 급습, 자동차 등을 빼앗아 당시 전라도의 유일한 물류 수송 루트인 호남선의 만경교를 폭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943년 5월 17일 밤 화랑회와 독립당의 동지들이 고갈봉 광산에 집결했으나 공교롭게도 광산 안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이곳에 전북도경의 형사들이 급파되어 광산 입구에서부터 검색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에 동지들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여 잠적하며 후일을 기약했으나, 이들의 조직과 계획은 1945년 4월 김제경찰서에 발각되었다.
결국 이상운 등 8명과 항일투쟁으로 퇴학당한 독립당원 5명 등 13명이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시련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항거한 이상운 의사는 18세를 일기로 그 해 7월 17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이리농림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학생들을 취조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
(동아일보 1930년 12월 18일 기사)
동아일보
이리경찰활동 농림교생취조 / “팜프레트” 발행 혐의로 / 퇴학귀향생까지 구금 [이리] 전북이리농림학교 조선인 학생측에서 동맹휴학을 한데서 발단하야 9명의 희생자를 내엇슬뿐 아니라 그중 윤수동, 박사진 두학생은 오랫동안 경찰에 피검되어 엄중한 취조를 밧다가 석방되엇다함은 이미 보도한바 어니와 이리경찰은 뒤이어 그간 사상서적을 본다고 학교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밧고 이미 귀향해서 잇는 7, 8명중에서 내용은 탐문한 바에 의하면 학교 내에서 복사지로 “배움의 무리”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야 동창간에 돌려본 사실이 발견된 듯하다고 한다.
이리농림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학생들을 검거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
(동아일보 1931년 7월 25일 기사)
동아일보
이리서 활동 학생 수인검거 / 여러 곳 가택을 수색하얏다 / 공산당선언서를 압수 [이리] 전북 이리경찰서 고등게는 지난 20일 돌연활동을 개시하야 금춘에 이리농림학교 맹휴사건의 주동자로 간주하든 이리시내 윤수동을 검거하야 일시 취조에 착수하게 되엇다한다. 그리하야 이어서 경찰은 또한 동일 오후에 이리시내 일출정 김석동의 가택을 수색하얏스나 하등수확은 업섯든바.(중략)현장을 림검하다가 드듸어 모처에 감초어 둔 공산당선언을 압수하고 또 다른 “팜프레트”도 수종 압수하여 갓다한다.
화랑회 이상운 열사 추모탑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