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多이로운 문화도시 익산
이리,
근대 익산의 출발
이리(裡里), 지금은 시간 속에 남겨졌지만 익산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리’가 지명으로 등장한 가장 오랜 기록은 조선후기 정조대인 1789년 발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다. 여기에 남일면(南一面) 이리(裏里)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이리는 남일면에 속해있던 작은 마을이었는데, 갈대만이 무성한 습지로 지금의 구시장 부근에서 주현동과 갈산동에 거쳐 인가라고는 10여 호에 불과한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리라는 지명도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솜리라고 불리던 것이 한자 지명인 裡里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 이리(裡里)가 지명으로 표기되는데 바로 이곳이 이리의 본래 땅 솜리다. 이리는 본래 1895년 전주군 남일면에 속했으나 1899년 익산군으로 귀속되었다. 1912년 3월 6일에는 호남선이 개통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이리역이 개설되면서 이리의 역사는 급변했다. 1914년 일본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익산은 북으로는 용안, 여산, 함열까지 포괄하게 되었고, 1917년 면제가 시행되면서 전주, 정읍과 함께 지정면(指定面)이 되었다.
이리경관(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조선총독부 발행 이리지도(1919년)
국토지리정보원 소장자료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지도이다. 측량은 1916년에 이루어졌고 지도가 발간된 시기는 1919년이다.
‘미증유(未曾有) 의 일’
이라는
이리의 발전과
전군가도
1917년 지정면이 되면서 이리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이리는 호남선 개통 이후 1915년 일본인 2,053명, 조선인 1,367명의 신도시로 발전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에 대해 일본인들은 “미증유(未曾有)의 일” 이라고 했다.
이리(裡里)의 등장은 군산 개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산은 일찍이 호남평야의 수탈을 위한 항구도시였는데, 이곳에 모여든 일본인들이 토지 매수와 상업을 목적으로 전북 각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리에 맨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1906년 군산에서 이리로 이주한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의 다나카 도미지로(田中富次郞)였다.
일본은 군수품의 원활한 보급과 미곡의 수탈을 위해 좀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운송수단을 고민했는데 바로 그 결과가 전주-군산간 도로였다. 전군도로는 1907년 5월 1일에 대한제국 궁내부 치도국 전주출장소가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10월 개통되었다. 전군도로는 전주-동산촌-대장촌-목천포-대야-군산으로 대부분 일본인 농장들이 있는 곳을 지났다.
이리시가지(일제강점기 초)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일제강점기 전군가도(좌)와 이리역 앞 중앙로(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불붙은 호남선
철도역 유치경쟁과
반대운동
1905년 호남선 철도부설이 계획이 세워지면서 철도노선을 유치하기 위한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일본은 처음 금마-전주-목포의 노선을 염두에 두었지만 금마와 전주에서는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전주의 호남선 반대는 전주의 맥이 끊어진다는 풍수설을 믿는 전주 유림들의 문제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호남선 개통과 함께 전주 중심의 전통상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지역유지들의 이해관계가 더 컸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호남선 노선을 유치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군산의 일본인들은 연산-대야-김제-정읍 노선을 주장했고, 전주의 일본인들은 동산촌-김제 노선을 주장하며 맞섰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두 노선을 모두 배제하고 그 중간지점으로 이리-목천포-김제 노선을 결정했다. 당시 전라북도 일대 최대의 갑부 중 하나였던 박기순-박영철 부자의 땅이 지금의 이리역 앞 일대에 광범위하게 걸쳐있었다.
1912년 3월 6일 역무를 개시한 이리역의 첫 번째 노선은 이리-강경과 이리-군산의 군산선이었다. 왜 강경과 군산이었을까? 강경은 전군도로가 개설되기 이전 서울과 전주를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강경은 동해안의 원산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로 불렸고, 금강의 지류가 합류하여 서해로 연결되는 육로과 수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중부지역의 중심이었다. 군산은 전라도의 미곡과 자원을 수탈하는 전략항으로 1900년 군산-오사카 사이의 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요컨대 강경은 전통적인 전략적 교통거점이었고, 군산은 떠오르는 수상거점이었던 셈이다.
이리역은 바로 그 강경과 군산을 연결하며 장차 전라도 전체를 거미줄처럼 엮어나가는 육상교통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리역의 존재는 군산항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개항장 거류지가 일본과 조선을 잇는 거점이기 때문에, 교통체계가 일본의 시모노세키항, 요코하마항에서 출발하여 부산항과 마산항, 목포항, 군산항, 인천항 등 해로를 통해 연결된다는 점이 일본의 육상-해상 교통체계의 핵심이었다.
호남선의 개통은 전통적인 한국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이 왜 그토록 철도를 깔고 싶어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철도의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대해서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는 조선사람들이 받았던 놀라움과 충격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박영철(朴榮喆, 1879~1939)
이리농림기념관
전북 익산군 출신인 박영철은 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1904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익산군수, 함경북도 참여관, 전라북도 참여관, 강원도지사, 함경북도지사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그의 행적은 재계(財界)에서 활동 하는데 전북 유일의 지방은행인 삼남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회사의 이사를 겸했으며, 1939년 뇌일혈로 사망한다.
초기 이리역(좌)과 새롭게 정비된 이리역(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이리역은 1912년 3월 6일 강경-이리 간 호남선과 이리-군산 간 군산선 개통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29년 9월 20일 역사를 근대양식으로 신축 준공하였다.
이리역 내부(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철도지도』(1912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자료
1912년 4월 오사카의 아루모 인쇄합자회사가 제작한 조선철도 지도이다. 지도에는 당시 철도 노선이 표시되어 있고, 부산-서대문, 영등포-인천, 용산-신의주, 황주-겸이포, 삼랑진-마산, 평양-진남포 간의 거리와 명승지가 표로 정리되어 있다.
『조선철도약도(朝鮮鐵道略圖)』(1934년)
붉은 선은 국가철도이고 파란 선은 민간소유의 사설철도이다. 가는 선은 협궤선로를 의미한다.
구이리와 신이리, 그리고 금마
구이리(혹은 원이리)는 이리역 중심의 중앙동에서 동남향으로 1km 거리에 있는 곳으로 전주-삼례에서 개항장 군산에 이르는 중간 지점이다. 이곳은 본래 전주와 군산을 오가는 보부상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는데, 1899년 군산 개항 이후 점차 더 많은 객주와 보부상들이 이곳을 다니면서 시장은 더욱 커졌다. 이곳이 바로 솜리시장, 과거 이리시장 혹은 구시장으로 불렸던 지금의 남부시장이다.
금마는 구익산의 중심지였다. 옛 마한의 도읍지이자 백제의 왕도터이기도 했던 이곳은 용화산과 미륵산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천혜의 땅이었다. 넓고 풍요로웠던 이 땅에 고대국가의 기틀이 세워지고 유력한 가문들이 왕성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산이 개항하고 전군가도가 열리기 전까지 금마는 전주와 강경 사이에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다.
금마와 함께 함열도 구익산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금강 연안에 성당(聖堂) 조운창(漕運倉)이 있어 이곳의 곡식을 경창(京倉)으로 날랐다. 함열은 이 금강 줄기를 타고 새로운 문명이 들어서는 입구의 역할을 했다. 망성면의 나바위성당과 성당면의 두동교회는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를 대표하는 초기 유적들이다. 함라의 삼부자집도 호남평야의 풍요로움 속에 남겨진 역사자원이다.
1912년 이리역의 호남선 개통은 이리를 전대미문의 빠른 속도로 발전시켰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한 신이리의 놀라운 발전은 금마를 중심으로 한 구익산의 침체를 의미했다. 금마뿐만 아니라 전주, 강경 등 조선의 전통도시들은 모두 같은 운명에 처했다.
『전라북도 관내도』에 나타난 이리지도(1925년)
금마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1924년)
익산군 관아 부속건물인 훈호당(시기미상)
익산 미륵사지 전경(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
이리번영조합과
도매도시
이리의 상업
1908년 이리에 진출한 일본인 오기 오네츠케(扇米助) 등이 청원을 주도하여 익산군청과 우편소가 금마에서 이리로 옮겨왔다. 1911년 철도공사가 시작되면서 익산헌병분대와 익산변전소도 옮겨왔다. 이리우편소는 훗날 조치원과 함께 조선의 2대 우편소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금마는 쇠락하고 신이리는 번성했다.
1911년 2월 15일, 신이리의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이리번영조합의 결성은 이리 발전에 일대 계기가 되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은 신이리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갔다. 이리번영조합의 초대 대표는 오하시농장(大橋農場)의 주인 오하시 요이치(大橋與市)였으며, 간사는 오기 오네츠케(扇米助)였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상도시를 만들어갔던 일본인들은 신이리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가옥이나 토지를 빌려주거나 팔지 않고 버티며, 일본인들의 집과 농장을 습격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다나카 도미지로(田中富次郞)와 오기 오네츠케(扇米助)의 집과 일본인 농장들이 공격당해 불에 타고, 금마의 우편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지자 일본인들은 결국 대장촌의 익산헌병부대를 이리로 옮겨 치안을 강화했다.
1917년 익산은 지정면으로 지정되었다. 수원, 광주, 대전, 강경, 전주 등과 함께 전국 23개 지정면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이리는 빠르게 성장했다. 1914년 이리역의 통계에는 승하차 인원만 16만에 이르고 오고간 화물들이 약 28톤에 이르며 호남선 각 역 가운데 1위의 역이 되었다. 이리역이 발전하면서 ‘군산-도매, 이리-소매’의 상업구도가 깨지고 이리로 호남 최고의 도매상들이 몰렸다. 이리의 도매거리에는 어문옥(御問屋)이 몰렸는데, 1915년 후루카와상점(古川商店)을 비롯하여 45개소의 어문옥이 있었다. 이 거리에는 미곡전문상점은 물론이고 잡화, 신문, 여관, 판유리, 장신구, 화과자에 이르기까지 근대문물이 거래되는 최고의 상업지역이 되었다.
익산군청(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1911년 군내면(금마면)에 있던 익산군청이 남일면으로 이전하였다. 1928년 간행된 『익산군사정』에 의하면 익산군청은 익산군 익산면 대정정(大正町) 731번지에 위치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리공립소학교(현 이리중앙초등학교) 운동회 전경(일제강점기)(좌)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이리세무서(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재정 독립을 추진하며 세무기구를 독립하려 했지만, 일본 내부적으로 긴축재정정책과 조선 내에서 증세로 인한 반발로 좌절되게 된다. 세무기구의 독립은 1934년이었다. 세무관서는 경성, 광주, 대구, 평양, 함흥 등 5개 지역에 설립되었다. 광주세무감독국 관하에 있었던 이리세무서는 1920년대 이리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리우체국(1958년)(좌)
이리경찰서(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1919년 8월에 여산면에 경찰서가 신설되었는데 이후 10월에 이리로 이전하면서 이리경찰서로 개칭하였다. 이후 1928년에 이리경찰서의 새청사가 완공되었고 구청사는 재향군인회 이리분회의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상업과 유흥의 영정통, 관공서와 학교의 본정통
일본인들은 이리를 이상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도로를 비롯한 도시계획을 시작했다. 1911년 일본은 토지수용령을 공포하여 조선인의 토지는 강제로 수용하고, 일본인들의 토지도 기부를 받았다. 여기에 앞장선 일본인이 바로 오하시농장(大橋農場)의 주인 오하시 요이치(大橋與市)와 오기 오네츠케(扇米助)였다. 1913년에 오하시 요이치와 오기 오네츠케는 이리역 앞의 도로를 조성하기 위해 토지를 기부하였고, 1914년에는 역시 오하시 요이치가 익산군청의 이전을 위해 청사부지로 토지 176평을 기부했다.
1919년 이리지도에 보이는 이리 시가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의 도시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이리역 전면부를 경유하여 전북경편철도와 나란히 개설된 동서방향의 혼마치도리(本町通), 호남선 철도 부지를 따라 개설된 남북방향의 사카에마치도리(榮町通), 이리역 동남측에서 금마방면으로 분지되는 미유키도리(幸町通), 이리역에서 구이리를 경유하여 금마방면으로 이어지는 히쿠마치도리(拏町通)가 주축이 된 4개의 큰 도로를 찾아볼 수 있다.
상업과 유흥의 거리였던 영정통과 달리 동서의 본정통(지금의 중앙로)에는 관공서와 학교가 집중되었다. 새로 생긴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격자형 구획들이 만들어지며 그 주변에 일본식 시설물이 건설되었다. 이곳에 관공서, 학교, 금융기관 등 각종 도시기반 시설들이 들어섰다.
1914년 처음으로 이리좌(裡里座)라는 극장이 생겼다. 이 극장은 호남선 철도가 활성화되면서 이름을 알려 군산이나 전주의 극장에 들어온 흥행물을 가져와 상영하고, 흥행 횟수가 군산이나 전주보다 앞섰다고 한다. 또 이리 최초의 오락기관이었던 이리구락부는 이리 최초의 당구장인 옥돌장으로 당구대 외에 장기판, 신문 등도 구비하여 매일 밤마다 붐비었다고 한다.
영정통 거리(일제강점기_현 문화예술의 거리)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이리금융조합(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공립이리보통학교 전경(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이리 시가지(1928년)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매일신보 한면에 소개된 이리 각계인물(매일신보 1935년 9월 24일 기사)
매일신보
이리 각계인물소개매일신보 1935년 9월 24일자 6면 내용으로 한면에 이리의 각계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주요 인물, 산업체, 의료시설, 음식점, 종교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리에 거주한 일본인 타무라 토시코(田村敏子)가 그린 이리지도(해방이후)
이 지도는 2008년 당시 익산문화원 원장이던 김복현 선생과 전라북도청 김승대 학예연구관이 익산을 찾은 타무라 토시코에게 받았다. 이 지도는 일제강점기 이리읍의 도시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