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多이로운 문화도시 익산
이리는
‘지미(地味)가 뛰어나고 교통이 편리한 도시’
이리는 이리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도시이자 주변 농촌들과 연결된 농업도시이기도 했다. 1896년 대장촌의 이마무라농장(今村農場)을 시작으로 1918년까지 이리에만 무려 13개의 농장이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인은 이리에 대하여 이리는 첫째, 지미가 뛰어나고 둘째, 수리사업이 완성된다면 수해의 걱정이 없고 셋째, 철도의 개통에 의해 운수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농영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리에 본부를 두고 대농장을 경영했던 이들로는 한국인 백인기의 화성농장(華星農場), 박기순 농장과 김화형 농장이 있으며, 일본인으로는 오하시 요이치(大橋與市)의 오하시농장(大橋農場), 아나미 에이치(阿波榮一)의 미에농장(三重農場),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 이타이 신죠(板井信藏)의 이타이농장(板井農場) 등이 있다.
사나다(眞田)농장(일제강점기)(좌)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호소카와(細川)농장(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오하시(大橋)농장 석축(일제강점기)(좌)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전북평야(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일제강점기 익산 내 농장분포도(1932년 기준)
본 지적도는 1930년 전라북도에서 발행한 『토지측량표 조사보고』에 실린 '삼각점 일람도' 이다. 익산군내 행정구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였기 때문에 본 지적도를 활용하여 1932년 당시 군내 농장분포도를 제작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익옥수리조합
1908년 동양척식(東洋拓殖)주식회사(동척)가 이리에 들어왔다. ‘다쿠쇼쿠(拓殖)’란 식민지 개척을 말한다. 동척은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만든 기관으로, 창립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동척의 주도 하에 농업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인이 이주하였고, 동척에서는 1911년 신평리와 동자포 주변에 소작료 수납소를 설치하여 수만 마지기의 사유지를 관리하였다. 동척은 토지를 수탈한 뒤 일본인 빈농들을 이주시켜서 그 밑에 한국소작농을 두어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동척이 활동하던 시절 1926년까지 무려 30만명의 한국인이 농토와 경작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갔으며, 일본인 농민들은 1만호 가까이 늘어났다.
1920년대 일제는 대대적인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쌀파동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 익옥수리조합의 설립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일제는 미곡증산의 최대 장애를 관개용수의 불안정성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수리조합을 설립을 지원했고, 때마침 일본에서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었다. 이리 일대의 농장들은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수리시설을 갖추기 위해 만경강 중류의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수리조합을 통합하여 익옥수리조합을 설립했다.
익옥수리조합은 운암산 중턱의 대아리에 댐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삼례의 비비정 부근에 만경강 취입구를 개축하여 물을 조절하는 홍수방지체계를 만들었다. 이 사업에 500만원의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현재의 가치로 약 1조원의 자금이 투입된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동산리 소재 익옥수리조합 제수문(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조선총독부 시정 6주년 기념 임익수리조합 제언(1916년)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대아댐을 답사하는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일제강점기)
이리농림기념관 소장자료
익옥수리조합 평면도(1930년)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이리농림,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몰려들다
1922년 한국 근대농업의 한 획을 그은 이리농림학교가 드디어 개교한다. 10여년 앞선 1910년 전주와 군산에 공립농업학교가 문을 열었으나 이 학교들은 2년제(이후 3년제)의 실업학교였다. 이리농림은 유일한 관립학교이자 5년제 전문학교로, 조선학생과 일본학생 반반으로 구성된 이른바 ‘내선공학(內鮮共學)’ 농업학교였다.
이리농림은 1915년부터 일본인 대지주들의 열렬한 설립청원이 있었고, 1919년 2월 전라북도 실업가 회동에서 22명이 갑종 농업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인가 협정을 작성했다. 1921년 1월 이리농림학교 설립 청원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리농림학교 설립청원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가타기리 와조(片桐和三)였다. 그는 1915년부터 영농자 단체가 주창하고 청원서도 3번이나 제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1918년 9월 실업자 회동에서 22명이 모여 이리농림 설립을 청원했고, 1919년 3월 발기인 모임이 열렸다. 그리고 1920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관립 농림학교 설치를 계획하고 있으며, 그 후보지가 경성, 대구, 대전, 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상무위원회를 개최하여 소요 부지와 건축비 20만엔을 기부하기로 결의했다. 1921년 1월에는 익산군청에서 건축비 20만엔과 소요 부지 20만평을 기부하기로 하고, 26명이 참여한 설치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은 화성농장주인 백인기(白寅基) 한명 뿐이었다.
이리농림은 수원농림, 진주농림과 함께 조선의 3대 명문이었고,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들어오는 학교였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된 박정희도 이리농림을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이리농림은 근현대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인재들을 끊임없이 배출했다. 전북대 초대 총장을 지낸 고형곤 박사(1927년 졸업), 전북대 최장수 총장을 역임한 심종섭 전학술원장(1937년 졸업)을 비롯하여 1950년 졸업생인 조철권 도지사, 미원그룹을 세운 임대홍 회장(1940년 졸업), 세계적인 식품기업으로 성장한 하림의 김홍국 회장(1978년 졸업) 등이 있다. 이리농림은 해방 이후 전북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이리 근대농업의 요람이었던 이리농림학교도 1970년대까지 그 화려한 명성을 이어갔으나 1991년 학생모집을 중지하면서 그 명맥이 끊겼다. 이리농림은 1991년 국립 이리농공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결국 전북대 농과대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3년 2월 이리농림의 마지막 졸업식이 열렸는데, 그때까지 한국인 1만 3천 9백 70명, 일본인 1천 2명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이리농림학교 정문 전경(1928년)
이리농림기념관 소장자료
이리농림학교 수업모습(1928년)
이리농림기념관 소장자료
이리에 농림학교 설립을 확정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
(매일신보, 1921년 12월 9일 기사)
매일신보
이리농림학교 입학지원자가 초과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
(동아일보, 1929년 3월 13일 기사)
동아일보
이리농림교에 1,000여명 지원
100명 모집에 10배 이상
전북이리농림학교는 본시 관립으로 농림 양과를 별설한 것이 수원고농을 제한 외에는 조선의 효시오. 그 시설의 굉대함이 유일한터로 3년전에 도 이관으로 되엇스나 입학지원자는 조선각도를 통하야 응모함으로 그 출신의 각도활약이 상당함은 세인의 공인하는 바며 금년졸업생 중에도 도외생이 반수이상을 점하얏다한다. 딸하서 연연이 각도로부터 입학지원자가 물밀 듯 하는 터인데 금춘 지원기도 거오일로써 만기되엇는바. 양과 함께 100명모집하는데 10배이상을 초과하는 1,071명경이할 숫자를 시하얏스나 작년 1,141명에 비하면 70명이 감한 현상이라할지라도 경쟁시험은 매우 격렬하야 입학난은 도저히 불가피의 일이라더라..
황등호의 비운(悲運)과 대간선수로
이리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특별한 관심을 가진 토지는 옥구군 대야면과 개정면, 서수면 그리고 익산의 오산면과 춘포면 등 만경강 연안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논은 수리시설이 매우 빈약했고 늘 수량이 부족한 천수답이었다. 그만큼 생산력이 떨어졌고 따라서 지가도 매우 낮았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자금과 기술을 동원해서 수리시설을 만들어 개간 하거나 강물과 바닷물을 막을 방조제를 쌓는다면 방대한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측량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 척박한 만경강 연안에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선의 수리왕’으로 불렸던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가 이리에 와서 맨처음 주목한 것은 요교호(腰橋湖)로도 불렸던 황등호였다. 황등호는 조선시대 호남과 호서를 가르는 경계였고,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와 함께 호남의 3대 저수지로 불렸다. 조선초 폐제된 이 저수지를 살리기 위해 후지이 간타로가 1909년 임익수리조합을 만들고 공사를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대간선수로는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힘입어 세워진 익옥수리조합의 최대 공사였다. 대아댐에서 흘러내린 물은 고산면 어우보 취수구에서 갈라져 옥구저수지에 이르기까지 장장 80km에 이르렀다. 수리가 안정되면서 군산과 김제의 간척지까지 물이 흘렀고, 경작지는 확대되었고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대간선수로 건설 후 1938년 만경강 직강공사도 이루어졌다. 만경강은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전주-익산-김제-옥구 등지를 지나 서해바다로 흐르는데 그 길이는 98.5㎞였다. 그러나 곡류하천(曲流河川)을 바르게 펴는 직강(直江)공사를 하면서 길이 76㎞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하여 강의 실제 길이를 줄여 놓았다.
대간선수로는 1백여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농업용수와 산업용수로 쓰이며 익산평야를 적시고 있다. ‘우리나라 모든 논에 물이 말라도 이곳은 물이 흐른다’는 이곳은 목천포를 타고 전군도로를 따라 옥구까지 흐르고 있다.
익옥수리조합 용수로와 이리 상수원 모습(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임익수리조합의 익산천 물줄기(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익산 당산천통교 공사 현장(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준공된 용수로 전경(일제강점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황등호가 표현된 지도(1925년)와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
국토지리정보원 소장자료(지도) / 이리농림기념관 소장자료(인물)
지도상에는 요교호(腰橋湖)로 적혀 있다.
대간선수로의
이면에 흐르는 조선농민들의 눈물
대간선수로는 1920년 시작하여 1923년 완공되었다. 대아댐과 만경강은 대동맥 같은 대간선수로를 따라 물이 닿았고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늘었으며 경작지는 확대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수리시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을 위한 ‘증미계획’이었고, 조선은 강력한 통제 경제를 겪어야 했다. 대규모 댐과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조선인들의 토지는 값싸게 팔리거나 강제수용되었고 소작인들의 수세부담은 높아져갔다. 또 수리조합 구역 외의 농민들은 기존의 용수공급원을 잃으면서 가뭄과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대간선수로와 만경강 직강 공사로 관개용수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자 수리조합에서는 대대적인 농사개량사업과 경지정리사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수리시설의 사용으로 수세가 높아졌고, 비료사용이 늘면서 소작인들이 비료대를 부담해야 했다. 경지정리가 진행되면서 소작권이 변동되고 소작지의 형질과 위치도 바뀌었으며, 노동강도는 점차 높아졌다. 소작료는 전통적으로 30% 수준이었으나 수리조합이 결성되면서부터 50%까지 인상되었다.
1927년 옥구지역의 이엽사 쟁의는 무려 80%에 달하는 소작료에 반발한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운동이었다. 결국 1930년대에 이르러 10정보(町步) 이하 중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은 급속하게 몰락했다. 1930년 익옥수리조합 내에서 10정보 이상을 소유한 한국인은 12명에 불과한 반면 일본인 지주는 44명에 이르렀다. 1921년 9월 익산군 농민들은 농지를 침해하는 수리조합의 수로를 매몰할 것을 요구하면서 도청을 향하여 시위를 벌였고, 1924년 7월에는 오랜 가뭄에도 농민들에게 물을 주지 않는 수리조합 제방을 파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익산의 농민 600명이 익옥수리조합이 삼례 부근에 만든 갑문 때문에 식수가 부족하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익산 당산천통교 공사현장(좌)와 관개용 제1수로 전경(일제강점기)(우)
군산 동국사 소장자료
사진 속에 돌로 신축한 수로의 모습이 있다.
새로운 개수로가 분당 배수량이 획기적임을 강조하는 글이 사진 하단에 적혀있다.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자 수리조합 제방을 파괴하기 위해 익산지역 농민들이 시위한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동아일보, 1924년 7월 8일 기사)
동아일보
수리조합제방을 익산농민이 파괴
날은 가물고 모자리는 말라서 뎌사위한 하고 싸우는 농민들
경찰에서 무장출동 / 생사를 불고하는 농민들 되도록 관대히 처치할 듯
전북지방은 가뭄이 심하야 민심이 흉흉하여 익산군 동산리 익옥수리조합 수문 부근디에 사는 농민 수백명은 흉년 들어 굶어죽으나 미리 감옥에 가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란 비창한 부르지짐으로 처처에 모이어 수백만 두락의 못자리가 다말라 붓되 오즉 넘치게 흐르는 수리조합물을 볼때는 눈이 뒤집히는 듯하야 이 운명을 최후로 호소하는 뜻으로 지난 3일 새벽에 수리조합제방을 파괴하야 인수를 도모하자 수문직이 와 두편의 격튜가 잇고 급보를 들은 경찰서원도 크게 출동을 하야 민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를 인치 취조하는 등 한참 살풍경을 이루엇는바. (이하생략)
물부족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수리조합 갑문을 파괴한 익산농민들을 다룬 기사(동아일보, 1924년 10월 25일 기사)
동아일보
600농민 대시위 익산수리갑문을 파괴코저 / 문제의 원인은 음료수 까닭 지난 22일 오전 10시 익산군 대장촌 부근 주민 600여명이 그곳 보통학교 앞 광장에 모히어 손에는 삽과 광이를 들고 시위행렬을 지어가지고 삼례에 잇는 익옥수리조합의 수로 취입구인 갑문을 파괴하려고 진행하는 것을 그 곳 주재소의 지급보고로 이리경찰서에서 정 경부이하 6명의 경관이 자동차를 몰아 현장에 이르러 간신히 진무한 결과 무사히 해산되엿다는데(이하생략)